닫힌계에서 열린계로의 이행
김휘아 개인전 <몸의 결속 해제>
글_임휘재(독립 큐레이터, 미술비평)
“나에게 균형은 고요가 아니라 극도로 동적인 상태이다.
세계가 컵의 끝자락에 정확하게 물이 차 있는 것과 같다면 그 고요함은 죽은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는 과잉이자 결핍이다.”
-김휘아 작가 노트 중 일부 발췌-
매끄럽게 감지된 세계는 닫힌계¹이다. 만약 세계라는 식탁 위 하나의 컵에 물이 담겨 있다면, 그 표면에는 증발이 있을 것이다. 한편 공기 중을 떠다니는 수증기의 일부는 미약하지만 컵에 담긴 물 표면으로 액화되어 흡수될 것이다. 이러한 시간이 쌓임에 따라 증발과 액화는 고요한 평형을 향해간다. 물질 이동이 불가한 닫힌계에서 평형을 맞춘 물의 표면은 더 이상 어떠한 변화도 없다.
김휘아가 감지한 세계는 열린계이다. 열린계에 놓인 컵의 물 표면에는 멈추지 않는 증발과 액화가 있다. 1억여 개의 물방울이 수증기가 됨과 동시에 1억여 개의 수증기가 물방울로, 1백여 개의 물방울이 수증기가 됨과 동시에 1백여 개의 수증기가 물방울로, 10여 개의 물방울이 수증기가 됨과 동시에 10여 개의 수증기가 물방울로, 평형을 맞춰간다. 그러나 물질의 교환이 가능한 열린계에서 새롭게 유입되는 물 분자를 막을 도리가 없다. 맞춰진듯한 평형은 과잉과 결핍 안에서 미세한 조정을 끝없이 거듭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매끄럽지 못한 세계의 평형 상태는 균형 맞추기가 멎은 상태가 아니었다.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동반한 채 균형을 맞춰갈 뿐이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은밀하다. 따질 것 많은 우리는 세상을 상온에 1기압²으로, 오후 1시의 온습도는 20°C에 60%로³, 세상을 이해하는 효율성을 위한 규정된 일시적 닫힌계로 살아간다. 우리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은밀함에 주의를 기울여 은밀한 것을 알아차리기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감지의 영역을 확장하며 주의를 기울인다면 표면은 늘 분주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¹ 닫힌계(닫힌系)는 열린계(열린系)의 반대 개념으로, 열역학적 정의에 의하면 에너지의 출입은 가능하지만 물질의 출입을 불가능한 계이다. 반대로 열린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출입이 모두 가능하다. 완벽하게 차단된 아크릴 뚜껑이 덮인 공간(닫힌계의 공간) 안에 물 담긴 컵이 놓여있다면, 물의 표면에서는 증발과 액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다가, 어느 순간 평형 상태에 이르게 되며, 추가되는 물 분자가 없는 닫힌계이기에 평형은 멈춤의 상태로 지속될 수 있다. 반대로 열린계에서는 유입되는 물질(물 분자)에 따라 평형을 계속해서 맞춰가야 한다.
² 일반적으로 물리, 화학을 적용한 공학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온(25°C)과 1기압 상태를 상정하며 풀어야 할 변수를 한정한다. 그러나 열린계의 실제 환경에서는 상온과 1기압의 상정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유효한 오차를 포함한 일시적 상태일 뿐이다.
³ 《몸의 결속 해제》가 한참 준비 중인 2024년 10월 19일 오후 1시의 온도와 습도이다.
김휘아는 《몸의 결속 해제》를 통해 자신의 감지를 닫힌계에서 열린계로 이동시킨다. 표면에서의 은밀한 일들에 주목하고, 자신의 몸과 의식을 활짝 열어 세계를 향해 몸을 내던진다. 그는 기술을 통해 감지⁴의 영역을 확장하고, 《몸의 결속 해제》를 자신의 감지가 도래하는 장소로 설정한 후 작품들을 통해 감지를 현시한다. 김휘아는 인간, 신체, 기술, 의식, 생명, 감각, 존재가 상호적으로 과잉되고 결핍되는 과정의 틈을 민첩하게 포착한다. 이 틈은 서구 형이상학의 자기 완결적 특성을 넘어, 즉 김휘아의 닫힌 체계에 대한 저항과 열린계로의 전이를 통해 파악된다. 이는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기술 신체라는 이질적 결속과 재배치를 통해 제시된다.
김휘아는 다분히 살아있는 것과 같은 세계를 감지할 때의 감격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한다. 그의 예술 작품은 자기 자신의 개념을 결여한 상태이거나, 개념의 과잉 상태로 표현된다. 《몸의 결속 해제》의 5개의 작품들, 3개의 <Extrusion> (2024)과 관객 참여 작품 <돌출 신체>(2024), 퍼포먼스 작품 <≈>(2024)은 낭시가 말했듯 “예술의 두 개의 개념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하나는 기술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숭고한 것”⁵이다. 김휘아가 이 작품들을 통해 만들어낸 이질적 결속의 이미지는 매 순간 진행되는 의미화의 결과에 대한 단절과 그에 대한 판단의 보류로 나타나는 다양한 관계 맺기의 접촉이다.
<Extrusion>(2024) 시리즈로 만들어진 3개의 작품, <Shirshasana(머리서기)>, <Setu Bandha Sarvangasana(다리자세)>, <Utkatasana(의자자세)>는 각각 반전, 연결, 현존과 부재를 의미하는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의 결속 해제》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요가’라는 소재는 매 순간 진행되는 의미화의 결과에 대한 단절과 판단 보류의 요청을 표현한다. 열린계에서의 평형 상태가 그랬듯이, 요가의 수행 속 명상이란 고요 맞추기가 멎은 자기 완결적 상태가 아니다. 마음과 몸의 평안을 찾기 위한 명상은 끊임없는 집중 시도와 실패의 반복으로 이뤄진다. 요가를 하는 우리는 매 순간들의 감지를 분절하고 집중 실패를 비난하지 않고 반복할 뿐이다. 요가는 세계를 향해 신체와 의식 열어젖히는 수행이다. 요가는 스스로의 존재에 몰두하길 시작으로 자신의 한계를 이해하고 내재적 주체에서 외재적 존재들과 만나는 열린 주체가 되는 훈련이다. 김휘아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닫힌계로 위치해왔던 한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닫힌계에서 열린계로 내몰며 매 순간 기민하게 외부와 접촉한다.
⁴ 반복적으로 사용된 ‘감지’라는 단어를 설명해 본다. ‘감지(sens)’는 장-뤽 낭시(Jean-Luc Nancy)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감각(기능), 감지, 의미, 지각, 관능, 성욕, 직감, 방향, 흐름, 식별력, 의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sens’의 번역이기도 하다. 낭시가 "감지가 의미화와 다르며, 단지 의미화나 비-의미화와 같은 어떤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감지는 우리의 실존적/선험적 조건이다. 말하자면 실존이 그 자체로 선험적인 것이라는 조건, 단순하고도 직접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규정하지 않는 조건이다. [...] 감지는 도래하는 것의 의미화가 아니라 어떤 것이 도래한다는 사실 자체의 감지이다. 그것은 그 내부에서 우리가 실존해야 하는 감지이다." 라고 밝힌 것에 더해, 김휘아의 작품이 컴퓨터 비전 기술과 피지컬 컴퓨딩 기술의 ‘센싱’을 통해 감지하고 반응하는 구성을 지닌 것, 이를 통해 김휘아는 의미화 이전의 실존적/선험적 조건으로 감지를 여긴다는 것과 연결하여 ‘sens’를 감지로 사용한다. 장-뤽 낭시,『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역, 인간사랑, 2010, p.230.
⁵ 장-뤽 낭시, 『ミューズたち(뮤즈들)』, 荻尾厚志, 月曜社, 2018, p. 15.
특히 기술 신체의 이질적 결속과 재배치가 전면에 드러나는 3개의 <Extrusion>(2024) 시리즈는 무한히 자기 동일성으로 귀환하는 절대적인 자기동일성, 절대적 내재성과 통일성을 거부하는 단수적 복수인 존재이다. 이 작품들은 열린 신체의 상태로, 컴퓨터 비전 기술과 피지컬 컴퓨팅 기술을 통해 구동되는 스네이크 로봇암과 결속하고 세계와의 연결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들은 신체의 내부에 위치한 순환계의 이미지와 동작 메커니즘의 긴밀한 이미지를 열린 상태의 시각 정보로 노출한다. 카메라를 통해 움직이는 관객을 탐지하고 있는 스네이크 로봇암은 신체 내부에서 돌출된 듯 보인다. 이들 작품의 하단부에 위치한 3D 픽셀 형태의 신체 일부는 퍼포먼스 작품 <≈>(2024)에 등장하는 퍼포머 신체의 3D 모델링과 김휘아의 과잉과 결핍을 거쳐 매끄러움을 상실한 채 기술과의 결속을 열어 받아들인다. 본 시리즈의 전작이었던 <Extrusion>(2023)이 작가 본인의 몸을 본뜬 외형에 스네이크 로봇암을 더했던 형식과는 다르게, 신작 시리즈는 퍼포머 몸의 3D 모델링, 그 데이터의 3D 프린팅 출력, 기계장치의 이질적 결합으로 작가 본인의 주체적 몸을 구현한다. 이렇게 김휘아의 의도된 신체는 지향적이며 총체적인 주체이자 대상으로, 세계의 일부로의 통합 가능성을 품고 세계를 향해 내던져진다. 그리고 그는 메를로-퐁티(Merleau-Ponty)가 "예술적 표현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에 자체상의 존재를 부여하며, 이러한 자체상의 존재를 우리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사물로서 자연 안에 배열시킨다."⁶ 라고 말했듯 자신의 신체 표현을 세계의 재창조와 재구성이 매 순간 일어나는 감지의 영역으로 배열시킨다. 이를 위해 김휘아는 기꺼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것들과의 결속과 결속 해제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현 가능한 카메라의 센서, 컴퓨터 기술을 총동원하며 자신의 신체의 일부와 그 전체에 쌓여온 모든 감지를 늘어놓는다.
3개의 <Extrusion>(2024) 시리즈가 단수이자 복수의 형태로 이질성과의 접촉을 통해 내부와 외부 사이의 긴장감, 그리고 예술과 예술들 사이의 긴장감으로 위치했다면, 한편에 놓인 관객 체험 작품 <돌출 신체>(2024)와 퍼포먼스 작품 <≈>(2024)은 기술과의 결속과 결속 해제를 통한 감지의 과잉과 결핍을 경험하게 한다. <돌출 신체>(2024)에서 관객은 기계 장치와의 일시적 페어링(pairing)과 싱크(sync) 맞추기 과정을 분주하게 체험한다. 이는 결속에 따른 감각의 전이와 신체의 확장이 잡념 없이 맑고 깨끗한 의식 상태를 상정하며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의 한계를 보여준다. 퍼포먼스 작품 <≈>(2024)의 경우 ≈(근삿값)의 기호를 작품의 제목을 채택함으로써 다양한 주체들의 고정되지 않는 의미화 이전의 일종의 유예 상태로 우리를 끌고 간다. <≈>(2024)은 퍼포머의 신체와 작품들의 비언어적 소통, 이들의 움직임과 음악의 앙상블을 통해 생성되는 관계를 선보인다.
그동안 영상이나 VR을 활용한 형식의 작품을 선보이던 김휘아가 물질성이 나타나는 설치, 키네틱 형식의 작업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나는 김휘아가 물질성을 강조한 작업으로 나아감을 닫힌계에서 열린계로의 이행으로 본다. 닫힌계는 물질의 교환은 불가능한 조건이며, 에너지의 이동만이 가능하다.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 모두 가능한 열린계로 나아갔을 때, 그는 세상의 이질적인 것들을 만나고, 단일한 복수의 세상으로 몸을 내던진다. 지난날 동안 닫힌계에 머물며 자신에게 유입되고 방출되던 에너지의 이동에 주목하고, 그에 따라 무질서(혼돈)에 집중하던 그는 이제 에너지의 이동뿐만 아니라 물질의 이동이 가능한 열린계로 전이되고 있다.
⁶ M. Merleau-Ponty, Phenome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Librairie Gallimard, 1945, 이남인,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파주: 한길사, 2013, p. 202.에서 재인용.